카르마에 대해 느낌을 가지게 된 이유
카르마를 알게 된 것은 법륜스님의 즉문즉설을 보면서였다. 종종 카르마에 대한 이야기를 언급하셨고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무의식적 자동적 사고와 닮아 있었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면 이전에 어떠한 노력을 해도 접근할 수 없는 영역이었다. 힘으로 애써가면서 접근하려고 했기 때문인 것 같다.
그리고 그것을 정복하려 했기 때문에 더더욱 버거웠다. 이겨내려고 하다가 힘에 부쳐서 좌절을 하고 오랜 시간 회복을 하고 다시 힘을 내어 시도하다가 좌절의 연속이었다. 후에 나 자신의 카르마에 대한 이해가 없었고 접근 방법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카르마란?
카르마는 산스크리트어로 ‘행동’을 뜻한다. 여기서의 행동은 입으로 말하는 구업, 정신적 활동을 의업, 신체적 행동을 신업을 모두 포함한다. 보통 무엇인가 정해져 있는 것 같은 팔자로 이해하는 경우가 있다. 또 윤회의 개념으로 전생에 지은 과보로 인해 이생에서 갚아야 한다는 말도 있다. 여기에 있어서 근원적인 이야기는 모르겠지만 현실에서 연결하여 이해하기에는 적절하지 않은 것 같다.
카르마에 대한 설명 중 “종자와 밭이 서로 모르지만 싹이 트듯이 업의 본성도 그와 같다”는 말이 있다. 이것이 자신의 자아개념을 벗고 생각해 본다면 어떠한 것들이 만나 반응하는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보고 있는 것 같다. 그리고 그것들 중에는 똑같은 것이 없다. 과거의 시간이 모두 다르기에 똑같을 수가 없다. 지금 생성 되서 똑같을 수는 있지만 역시 시간이 흐르면서 절대 똑같을 수가 없다. 고유성을 갖는 것이다. 이처럼 카르마는 고유한 반응 현상을 이야기한다.
카르마에 대한 이해
카르마의 시작은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없었던 것이 맞다. 우리가 태어난 것은 우리의 선택이 아니다. 더 올라가서 우리의 조상도 우리가 어떻게 선택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우리의 시점에서 이것은 자연현상으로 볼 수 있다. 여러 사건과 여러 반응을 통해 태어난 것이다. 태어난 이후에도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황은 지속된다.
물론 어린 시절 우리가 다른 사람의 의사로 살아 숨 쉬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가 약한 존재로 완전한 의사표현과 행동을 하기는 어렵다. 거기에 우리가 태어나기 이전부터 지속돼 오던 카르마와 우리가 부모로부터 받은 유전적 성향, 부모가 만든 환경과 사고 시스템 안에서 자란다면 그 카르마는 더욱 가속화된다. 이 카르마 시스템이 우리의 몸에 들어오게 되고 그 카르마의 결에 따라 살게 되는 것이다. 끌어당김의 법칙으로 우리는 더욱더 익숙한 것을 끌어당기며 카르마에 날개를 단다.
그럼 우리는 팔자를 탓하고 다른 이들을 탓하며 원망해야 하는 것일까? 인생이 좋게 흘러가든 나쁘게 흘러가든 결국엔 자신의 책임이다. 흔히 알고 있는 책임과는 다르다. 여기서 말하는 책임은 내가 행동으로 변화를 주는 것을 말한다. 누구의, 어떠한 것에 탓을 돌리는 것이 아니고 어찌 되었건 이 육신의 껍데기에 살고 있는 것은 나 자신이고 이것을 컨트롤할 수 있는 것도 나 자신 뿐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내 탓도 아니다. 내가 만든 상황이 아닐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그렇지만 내 책임인 것은 분명하다.
이런 카르마가 가속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창조자가 등장한다. 기존의 카르마에서 벗어난 메타의 성격을 띠며 본인의 카르마에 대한 이해가 있다. 무엇보다 자신이 삶을 창조할 수 있다는 믿음이 있다. 자신은 카르마에 잠식당하는 존재가 아니고 스스로 주도하여 행동하는 존재로 본다. 이 창조자가 카르마의 악순환을 벗어나게 한다. 끊임없이 손에 쥐고 있는 것을 내려놓고 지금 이 순간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통해 내가 창조자였음을 깨닫는다.
카르마의 속성
카르마에는 세 가지 속성이 있다.
첫 번째는 무의식적이라는 것이다. 무의식은 내가 생각하기도 전에 훅 나오는 것을 말한다. 무의식의 속성을 가지고 있는 카르마는 내가 잘 모르는 가운데 나오는 경우가 많다. 나도 모르게 행동하고 있는 것이다. 무의식은 내가 생각해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내 인식에서 없는 무지의 공간이다. 그래서 나도 모르는 카르마들을 알기 위해서는 인지력을 높이는 수행을 통해서 순간순간 나를 포착하여 추적하는 방법을 사용해야 한다.
두 번째는 터줏대감이다. 어찌하여 내 인식 속에 처음 들어간 것들이 마치 나인 것처럼 행동하는 것이다. 내가 보고 듣고 느낀 것이 내 안에 들어왔다 하더라도 그것이 내가 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들어온 것들이 터줏대감 행세를 하며 자리를 내어주지 않는다. 다른 것이 들어올 틈이 없다. 심지어 그 입맛대로 세상을 바라보니 살이 오를 때로 오른다. 점점 꽉 자리 잡고 있다.
세 번째로는 끌어당김이다. 카르마는 그와 비슷한 것들을 끌어당긴다. 그래서 자기편을 많이 만들어 카르마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한다. 설령 깨달음을 통해 알았다고 하더라도 그 기세를 당장 몰아붙이지 않는다면 이내 블랙홀처럼 그 깨달음을 끌어당겨 잠식시켜버린다. 한 발 나아갔지만 다시 원점으로 회귀되는 것이다. 한 번 원점으로 간 깨달음은 다음번에 다시 깨닫는 다해도 이미 그 깨달음 자리에는 카르마가 지키고 있어 처음보다 빨리 회귀시킨다.
카르마 다루기
꼭 카르마를 고치거나 극복하려는 것이 능사는 아니다. 카르마를 바꾼다는 것은 보통일이 아니다. 건물의 1층을 다시 짓는 것과 같다. 1층만 리모델링하는 것이 아닌 1층을 다시 짓는 것이다. 내 삶을 부정당하는 것 같은 느낌과 내 살점이 계속해서 뜯어져 나가는 듯 한 느낌을 이겨내야 한다. 죽을 각오를 하고 변화를 가져갈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보면 된다.
사람의 시간은 한정되어 있기에 카르마에 변화를 줄 것인지 안고 갈 것인지 선택해야 한다. 카르마를 극복하기 위해 죽을 각오로 움직인다면 그것이 성공했다고 하더라도 그 과정에서 막대한 세월이 걸릴 것이며 결과는 원점에 못 미치는 수준이 될 것이다. 내 노력 투입 대비 미미한 결과를 낳는 것이다. 장기적으로 안고 가는 것이 오히려 카르마에서 벗어날 수 있는 좋은 방법이 될 수 있다.
카르마에 대해서 인정하고 같이 동행하는 것이다. 어떠한 것을 알아차리고 인정하는 것부터 모든 문제의 50%는 해결이 된다. 카르마를 사라지게 할 수는 없어도 수행을 통해 계속된 알아차림으로 인지할 수 있고 대체제를 만들 수도 있다. 동시에 대처방법에 노하우가 생기게 된다. 또한 카르마를 만드는 것들에 대해 감사함을 느끼는 것이다. 이러한 카르마들로 인해 새로운 세상이 열렸기 때문이다. 감사함을 느끼는 것은 카르마에 대한 나의 위치를 한 수 위로 가져가는 것이다. 스스로 카르마보다 강한 존재로 인식함으로써 내 안에 카르마의 존재를 미미하게 만드는 것이다.
법륜 스님께서 말씀하시길 형성된 것은 소멸할 수 있다고 하셨다. 전체적인 소멸은 어려울 지라도 시시때때로 게릴라성 소멸은 가능하지 않을까? 시시 때때로의 소멸이 곧 전체적인 소멸과 동일한 것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사실 이렇게 양자택일의 선택이 아닌 장기적으로 안 가고 가면서 매 순간 죽을 각오를 하는 것이 더 효과적일 수 있다. 어차피 계속 같이 가야 한다면 이 카르마를 내 자원이자 기회로 만드는 것이 내 삶을 위대하게 만드는 일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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